-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가을이 깊어지는 일요일 아침,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조금 과장된 것이었다. 올 가을은 비도 잦고 기온이 높아 추수철도 늦어지고 단풍이 물드는 속도도 조금 늦다. 따라서 예년의 기온보다 조금 떨어지는 탓에 쉽게 춥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하릴없이 집에서 게으름을 부리다 이렇게 하루를 지내면 후회막급일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풍경 하나가 서둘러 길을 떠나게 만들었다.

영주하면 떠오르는 것이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있겠지만 얼마 전 알게 된 영주시 문수면의 무섬마을이 매일 눈앞에 아른거렸다. 강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와 강물이 흐르며 만든 넓은 백사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그것은 어릴 적 내 살던 도시의 가운데를 흐르던 남강(南江)의 백사장이 하얗게 반짝거리던 모습과 검은 고무신으로 모래무지나 송사리를 잡던 기억들로 겹쳐졌다.

◇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내성천의 풍경 ⓒ들찔레

바쁘게 차로 내달리다 휴게소 한 곳에 들러 커피 한 잔 뽑아들고 숨을 고른다. 누가 그렇게 시킨 일도 아닌데 혼자 힘들여 먼 길을 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사람들이 묻고는 한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다만 가보고 싶은 곳을 못 가면 안달이 난다는 것을 안다. 또한 그런 여정으로 몸이 힘들어도 충만한 기쁨을 얻은 나로 하여금 또 한 주를 열심히 살게 만든다는 것은 안다.

돌이켜보면 한때는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보기 위해 서두르기만 해서 볼 것을 못보고 느낄 것을 제대로 못 느낀 경우가 많았다.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여서 가는 곳마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 힘을 낭비한 적이 많았다. 목적지를 가서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중간에서 만나는 의외의 것들에서도 기쁨도 느낄 수 있어야 했는데 주변의 것들은 보지 못하기도 했다. 요즈음은 스스로 느긋하게 느끼려하고 욕심내어 다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답사의 목적에 충실하여 돌덩이 하나 나뭇결 하나라도 애틋하게 살피고 쓰다듬는 마음과 더불어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느끼고 그에 맞는 맛있는 음식도 음미하고자 한다. 늦은 아침에 떠날 수 있었던 이유도 가는 만큼 가서 볼 수 있을 만큼 보자는 여유가 조금은 생겼기 때문이다.

3시간 이 좀 넘게 차를 몰아 중앙고속도로 영주 IC에서 시내방면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5번 국도에 차를 올리면 문수면에 이르고 ´수도리 전통마을´의 입간판이 쉽게 무섬마을로 길 안내를 한다. 국도에서 지방도로로 내려 무섬마을 가는 길 왼편에는 내성천(乃城川)이 흐른다.

◇ 내성천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I ⓒ들찔레

때 묻지 않은 물길과 백사장, 강 건너 아직 푸른 나무와 산이 이루는 조화가 편안함과 더불어 평화스럽다. 아직 때가 덜 묻은 20대에 강 위로 줄 배를 타고 건너던 섬진강 인근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소년 시절의 남강과 더불어 섬진강에서 당시에 보았던 모래밭과 물길의 모습을 지금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한낮이다.

무섬마을은 안동 화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령포처럼 동네를 물길이 휘돌아 가는 물돌이동이다. 무섬 즉 수도리(水島里) 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속의 섬´과 같은 마을이다. 이곳의 첫 인상은 하회마을보다 덜 번잡하고 산 높고 물길 빠른 회령포에 비해 다가가기 쉬운 안정감을 준다. 무섬마을의 이런 형세를 일러 옛사람들은 매화가지에 꽃이 핀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매화낙지(梅花落枝)라고 이르거나, 물위에 연꽃이 핀 형상의 연화부수(蓮花浮水)의 형세라고 일컬어왔다. 또한 마을과 강 건너에 있는 낮은 산의 아홉 산줄기를 각각 한 마리씩의 용에 비유하고 그것들이 마을을 향해 엎드린 듯하다고 하여 구룡도회(九龍都會)라고도 불러왔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마주한 강가의 모래밭이 나를 설레게 하여 동네를 뒤로 두고 아무도 없는 모래밭을 혼자 거닌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이 새롭고 부드러운데 또 마음이 앞서 이 마을의 상징이자 확실한 아이콘인 외나무다리 쪽으로 발걸음 재촉한다.

◇ 내성천 외나무다리 II ⓒ 들찔레

어느 매체에서건 누구의 글에서건 무섬마을을 소개하는 곳마다에서 보았던 외나무다리는 무심히 강물이 흐르는 길목에 다리를 담그고 볕 좋은 가을 햇살아래에서 조잘거리는 물소리 음악처럼 들으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다리에 이르기 전 모래 밭에 털썩 주저앉아 햇빛에 반사되어 흐르는 물길을 바라본다. 작은 바람이 이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고 마음은 평온하다. 평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콘크리트 다리가 생기기 전 이 마을의 외나무다리는 매 해 세 개 씩 놓였다고 한다. 농로용과 통학용, 읍내 나들이용이 그것인데 장마로 떠내려간 다리는 물깊이가 얕아지는 가을에 세웠다고 한다. 다리는 소나무를 반으로 잘라 대충 다듬은 뒤 물길 얕은 곳을 골라 다리발을 세우고 상판을 얹어 놓은 형태인데 길이 150여m, 높이 약 60cm, 다리 폭이 20-30cm 정도로 매우 좁아 빠르게 걸을 수가 없게 생각되지만 다리를 건너보기로 한다. 
 

◇ 내성천 외나무다리 IIIⓒ 들찔레

보기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리 폭이 좁다는 것만 이유가 아니고 다리 길이가 길어서도 아니며 물이 깊은 때문만도 아니었다. 발을 옮기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보는 맑은 물이 너무 빠르게 흘러 어지러운 탓이었는데 외나무다리 위에 올라 물 가운데로 발걸음 옮기기 전 까지는 전혀 그러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살면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때가 더러 있을 것인데 외나무다리 위에서 벌벌 떠는 가소로운 나는 예상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 어지럽거나 다리가 후들거리게 되는 처지를 맞닥트리게 되면 어떻게 처신하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지 난감하다. 다리 위에서 잠시 하늘을 보고 물길을 보고 건너편 마을을 바라본다.

이렇게 맑은 내성천은 소백산 아래 죽계천(竹溪川)이 풍기 남원천(南院川)과 합류하여 영주 서천(西川)이 되어 삼 십리를 달려와 봉화 내성천(乃城川)과 무섬마을 뒤에서 합수하여 낙동강에 이르기까지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인데 섬계천(剡溪川)이라 불리기도 한다. 학문을 숭상하고 절개를 지킨 진나라 학자 대규(戴規)가 은둔했던 절강성 섬현 섬계의 지명을 따서 섬계(剡溪)라 칭하였고 이곳의 옛 마을 이름도 섬계였던 것이 일제시대에 수도리 즉, 무섬마을로 변하였다고 한다.

다리를 내려와 물가에 자리를 잡고 다시 앉는다. 물 흐름에 따라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눈에 넣고 가슴에 담는다. 이런 투명한 모습을 가진 강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기억에 오래 잡아두고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욕심내어 내 속에 채우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 욕심만큼 담아둘 마음의 크기가 부족한 탓도 있거니와 아무리 좋은 것들도 조금은 부족한 상태로 담아두는 것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오래 기억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무섬마을 가을풍경 I ⓒ 들찔레

마을로 발길을 돌리는데 멀리 버스 한 대에서 단체 답사객들이 내려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다. 나른하고 조용하게 가을 잠에 빠져들던 동네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골목길을 오가는 발걸음으로 잠시 분주해질 것이다. 나도 그 속에 들어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로 무섬마을에 인사를 건넨다.

이 마을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입향조(入鄕祖)인 박수( 1641～1699) 선생이 대나무 숲을 쳐내고 최초로 터전을 마련한 곳이며 그의 증손 사위가 된 김대(金臺) 선생이 영조말엽에 처가 마을인 무섬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선성김씨(宣城金氏)의 입향조가 되어 지금까지 두 성씨의 씨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번창했을 때에는 300여 호 1,500여명의 주민들이 골짜기마다 빈틈없이 집을 짓고 살았다는데 지금은 48가구가 살고 있으며 그중 100년 이상 된 옛집이 16동. 도 민속자료나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된 것이 9동이다.

◇ 무섬마을의 가을풍경 II ⓒ 들찔레

이런 오래된 동네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어슬렁거리는 일은 편안하고 즐겁다. 텃밭을 돌아 나오는 할머니께 가벼운 목례를 하고 할머니는 어디서 왔냐고 웃으며 반겨주신다. 그런 살가운 인사는 사람끼리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져 가는 백일홍 노랗고 붉은 꽃들이 담 옆에서 얇은 햇볕에 기대어 웃어주고 고추를 수확한 후 던져 둔 줄기묶음을 밟아 들리는 소리 하나도 도시의 콘크리트길을 걷는 우리들에게는 고마운 인사다.

단체 답사객 일행들에 섞이지 않고 한, 두 걸음 천천히 걷는 내게 또 다른 인사를 전해주는 것이 눈에 확 띈다. 영덕 장육사 가는 길 화수루(花水樓) 옆, 초가에서 보았던 까치구멍집을 본 것이다. 까치구멍은 음식을 만들면서 나는 연기를 외부로 배출하고 낮에는 빛을 받아들여 어두운 집안을 밝게 해주는 기능, 계절에 관계없이 통풍과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가진 집의 숨구멍이다. 알고 보니 이곳 무섬마을의 집들은 초가든 한옥이든 모든 집들에 까치구멍이 있는 까치구멍집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 초가의 까치구멍 ⓒ 들찔레                        ◇ 기와집의 까치구멍 ⓒ 들찔레

까치구멍을 가진 초가 앞에서 이른 아침 밥 짓는 모습을 상상한다. 멀리 강 쪽에서 보면 동네의 집집마다 밥이 익으며 나오는 연기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될 것이고 저녁 무렵 소죽을 끓이는 시간에도 같은 모습일 것이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하다보면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어느 나라 어느 마을에서건 집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면 안락함과 평화를 느낀다. 아궁이에 불을 때던 시절이라면 이 마을의 저녁도 그러했으리라.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 선생이 지어 살던 만죽재(晩竹齋)를 찾는다. 355년 전 박수 선생 11살 시절에 지어졌다는 만죽재는 따라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용마루 위의 기와 17장에 제작연대와 와공(瓦工)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그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집이다. 마을의 맨 위에 자리 잡은 이 집의 전면은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인데 팔작지붕의 처마 끝이 가을 하늘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규모가 크지 않으나 단단하고 야무지게 지은 진 집 뒤, 안채는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를 못한다. 경북지역의 집들은 거의 ´ㅁ´자 형태를 취하여 안채가 있는 내부를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옥구조이다.

 ◇ 만죽재 ⓒ 들찔레

그 위치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높다고는 하나 낮은 구릉에 높이로 따지면 평지에서 스무 걸음 정도의 높이라 아래에 있는 집들이 고만고만하게 보인다. 길 아래에서 보아도 만죽재는 골목길 돌아 들어오는 곳에서 지붕과 처마만 보일 뿐 작가 이문열의 고향인 두들마을이나 이언적의 외가 마을인 양동마을 등에서 보는 것처럼 집이 크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 마을에 대해 산은 높지 않으며 물 깊지 않으니 계거(溪居)의 양택지(陽宅地)요 한림학사의 명당이라 하였겠다 싶다.

마을을 돌다 다시 마을과 강을 연결하는 둑 위에 서서 해우당(海愚堂)을 향해 걷는다. 아까 온 단체 답사객들이 외나무다리 주위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깔깔대며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충 보아도 3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저들의 거리낌 없는 웃음소리는 자신들의 고향마을을 찾은 듯 편안해 보인다. 푸른 숲 우거진 강 건너의 집 한 채, 환학정(喚鶴亭)이 보인다. 반남박씨 일가가 세운 정자는 학이 날아들기를 바라는 뜻이 숨어 있음인데 여기서 학이라 하면 고고한 기품과 절의(節義)를 가진 선비의 풍모를 닮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해우당 ⓒ 들찔레

콘크리트 다리 건너 주차장과 담이 맞붙은 고옥이 해우당이다. 해우당은 선성김씨 후손으로 금부도사를 지낸 김낙풍의 고택이다. 솟을삼문 지나 마당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해우당 현판이 뚜렷한데 역시 안채는 들어설 수가 없다. 원형으로 깎아 세운 다리 위의 누마루와 사랑채는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당당하다.

강기슭, 둑을 따라 걷는 길에 피었다 지는 백일홍 선연하던 꽃 빛은 흔적으로 남고 대신한 코스모스가 조용한 마을에 유일한 귀염둥이가 되어 바람결에 춤을 춘다. 둑에 연결되어 마을로 찻길을 열어 준 다리 위에서 물 돌아가는 길을 굽어보면 무섬마을 강과 어우러져 가을 익어 가는 모습이다. 시인 조지훈은 처가 동네인 이곳을 배경으로 ´별리´ 라는 시를 남겼다. 그가 보았던 마을의 풍경도 지금 내가 보는 것과 별 다름이 없었을까? 쓸쓸한 계절의 느낌이 조금은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돌아오다 앉았던 내성천 모래밭에서 ⓒ 들찔레

별리(別離) / 조지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돌아오는 길, 내성천은 흰 모래밭과 맑은 물줄기 속속들이 내보이며 내 가는 길과 반대로 무섬마을 물돌이동으로 흘러든다. 차를 세우고 아무도 없는 강가에 다시 앉아 가을빛을 받아 흔들리며 흐르는 강물을 얼마나 더 보았는지 모른다.